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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필사

나인

by 켄탕 2024. 9. 6.

천선란

천개의 파랑 이후로 두 번째 읽는 천선락 작가의 장편 소설이다. <천개의 파랑> 만큼은 아니지만 <어떤 물질의 사랑>, <이끼숲> 보다 재미있었다.

많은 SF가 기후 재난과 자원 고갈 때문에 일어난 절망적인 세계관을 배경으로 한다. 그러나 <나인>에서는 문명의 멸망은 다른 행성의 이야기일 뿐이다. 다만 뒤틀린 어른들과 뒤틀려진 아이들을 다루고 있어서 욕심과 폭력으로 사람들이 마음이 황폐화된 심리적 디스토피아(?)를 그리고 있다.

마냥 "힘내서 이겨내자!"의 전개가 아니라 주인공이 자신의 능력을 길러가며 진실을 조금씩 밝혀내는 전개이기 때문에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었다.

<어떤 물질의 사랑>처럼 우리 모두는 서로에게 외계인이라는 언급이 나온다.

 


"나이를 먹는다는 건 세상의 비밀을 한 꺼풀씩 벗겨 내는 것이라고 했다. 그렇게 벗겨 낸 세상의 비밀을 함 겹씩 먹으면, 어떤 비밀은 소화되고 흡수되어 양분이 되고, 어떤 비밀은 몸 구석구석에 염증을 만든다."

 

"나인은 효정이 흘리는 눈물의 온도를 안다. 나인이 태권도를 포기하게 만든 눈물이었으니까."

 

"겉으로 보면 모르지만 당사자만은 느낄 수 있는 그 이질감, 낯섦, 생경감, 피곤함, 이곳에서 난데없이 추방될지도 모른다는 상상."

- <눈부신 안부>의 파독간호사가 생각나는 구절이다.

 

"소수가 다수를 이기기 위한 가장 확실한 방법은 지겹고, 지긋지긋하고, 진절머리 나게 구는 것이라고."

"세상 밖으로 밀려나는 건 온몸으로 막을 수 있다는 것, 그리고 한 명이 막는 것보단 여러 명이 막는 게 더 좋다는 것, 무른 흙도 밀리고 밀리다 보면 어느 순간 아주 단단해진다는 것."

- 가망이 없어 보이고 나아질 것 같지 않아 보여도 포기하지 말자

 

"잠자는 시간은 줄어들었지만 부부의 낯빛에는 생기가 돌았다. 책임져야 할 게 생겨서 그런 거라고, 지모가 언젠가 말해 주었다."

 

"누군가를 잃는다는 것은 세상 바깥에라도 그 이름을 붙여 두고 싶은 것이라고. 파도에 휩쓸릴지라도 모래에 이름을 적어 두는 것이라고."

 

"사랑이 다 똑같지는 않다는 걸, 사랑이 모든 걸 다 해결해 주지 않는다는 걸, 사랑 가지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걸, 사랑은 세상에서 가장 그럴듯한 낙관주의라는 걸. 낙관주의는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다."

 

"안다는 이유로, 무언가를 좋아하는 이유로, 세상이 믿지 않는 걸 믿는다는 이유로, 허락되지 않은 걸 탐한다는 이유로..."

"자신은 인간이 아니다.

 

그래서 그게 뭐 어쨌다는 거야."

- 우리는 모두 서로에게 외계인이다.

 

"누군가를 위해 운다는 건 그만큼 마음의 큰 부분을 내어 주었다는 뜻과 같다."

 

"바로 앞에 있는 걸 보지 못하고 탁해진 눈동자로 저 멀리 손에 닿지 않는 것만 바라보겠지. 자신이 밟고 있는 붉은 땅이 피로 물든 줄도 모르면서."

- 요즘은 이런 사람이 되는게 너무 두렵다. 스스로를 성찰하지 않고 고여가는 시기가 올까봐 두렵다.

 

"언제나 모든 사람이 괴로움을 이길 필요는 없으니까. 떄로는 괴롭게 하는 것으로부터 멀리 가는 것도 방법인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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